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익명
0.
살인사건으로 기소된 사건(사건번호 9044292)와 관련하여 피고 유태양의 지인인 탄원인 김영균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탄원하오니 선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탄원을 드리고자 하는 사건은 피고에 대한 살인사건입니다.
제가 봐온 피고는 정이 많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정의를 추구하는 바른 청년입니다. 피고와는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피고는 학생회 대표직을 맡을 정도로 동기 선후배들과의 신의가 두터웠고, 임직 후에도 학생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며 학교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있던 저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입니다. 피고는 절대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해칠 사람이 아닙니다. 늦은 밤 운전을 하던 피고는 어두운 탓에 무단횡단을 하는 피해자를 미처 보지 못해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사고사이며, 그 충격에 피고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피고의 도주치상은 사고를 낸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의 결과입니다. 피고의 악의가 없었던 사고사였던 점, 피고가 현재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탄원인은 재판장님의 선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
김영균이 유태양의 자취방을 제 발로 찾아갔다. 헤어진 지 4년 만이었다. 이별은 김영균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유태양은 그런 김영균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과씨씨였음에도 둘의 헤어짐에 주변인들은 캐묻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김영균은 조용히 남은 학기를 다니고, 그저 그런 회사에 취직했다. 유태양과 헤어진 뒤의 삶은 평면적이기 그지 없었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남들처럼 살 거라 믿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친은 술과 도박에 빠져 영균이 다섯 살 적 가정을 떠났다. 영균은 다섯 살 이후 만난 적도 없는 부친의 빚을 떠안게 되었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빚을 갚을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월급이 들어오는 대로 채권자에게 보냈다. 심기 잘못 건드렸다간 뒤지게 맞는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제 값을 보내도 대뜸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집안을 헤집고 갔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찾아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돈을 부족하게 보냈다는 이유로 맞았다. 강도가 점점 거세지자 배를 움켜잡은 영균의 손이 떨렸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영균은 폭우에 우산도 없이 도망 나왔다. 갈 곳이 없던 영균의 머릿속에 떠오른 곳이 태양의 자취방이었다. 4년 전을 마지막으로 처음이었다. 태양이 아직도 이곳에 사는지 모른다.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형.
.... 영균이?
4년 만에 본 유태양은 여전히 잘생겼다. 형이 해준 파스타 먹고 싶어. 이 상황에, 얼굴과 몸에 상처투성이인 채로 생뚱맞은 말을 내뱉었다. 감기 걸리겠다, 들어와. 태양의 집은 깔끔하고, 차분했다. 태양의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난 집이었다. 씻고 나와 옷 갖다놨어. 태양이 화장실 문 앞에 둔 옷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균과 맞췄던 커플 티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영균은 물을 맞으며 태양과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2.
영균이 신입생으로 입학했을 때 태양은 학생회 대표였다. 워낙 유명인사기도하고, 같이 다니던 찬희가 태양과 알던 사이라 건너 건너 잘 알았다. 셋이서 모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태양도 영균과 얼굴을 텄다. 찬희가 여자 친구가 생긴 뒤로는 거의 둘이 만났다. 자연스레 서로에게 호감이 생기면서 연인사이가 됐다. 학생회장인 태양 덕에 영균까지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영균이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해 중간 중간 위기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잘 극복해나갔다.
누구보다 태양과의 연애에 행복해하던 영균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학생회장이 회비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무시했다. 옛말에 삼인성호라고,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아 태양과 언쟁이 종종 있었던 패거리의 끊임없는 입김에 사람들이 점차 그 말을 사실로 믿기 시작했다. 태양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이내 회장직을 그만두라는 말까지 나왔다. 태양을 탐탁치 않아했던 이들을 이 때다 싶어 시위까지 벌였다. 영균은 태양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덩달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영균은 다른 이들의 입에 자신이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것까지 버틸 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대학 생활, 아르바이트, 태양과의 관계 모든 것에 지쳐있었다. 태양의 옆을 지켜주며 위로해 줄 처지가 되지 않았다. 영균은 태양에게 짧은 메시지만 남기고 군대로 갔다.
[헤어지자, 미안]
3.
씻고 나온 영균은 테이블에 앉아 태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태양은 진짜로 사귈 때 자주 해줬던 파스타를 하고 있었다. 영균은 물어보고싶은 게 많았다. 제대 후 복학했을 때 태양은 이미 졸업한 후였다. 헛소문인 게 밝혀지고 주동자들은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때 혜미가 은인이었지. 걔가 유태양 살렸어. 다 주작이라고 증거 모아서 게시판에 폭로글 붙이고 여기저기 사실은 이랬다, 다 말하고 다니고. 그 때 유태양 옆에 걔 없었으면 자퇴했을 걸.’
헤어지자고 한 뒤 태양은 어떻게 지냈는지, 내가 보고싶지는 않았는지. 또,
‘걔 졸업할 때까지 둘이 붙어 다녔어, 잘 어울리더라. 아, 미안.. 너는 괜찮냐?’
그 아이랑은 잘 만났는지, 아직도 만나고 있는지. 당차고 멋있는 아이였다. 말수가 적은 편인 태양과 반대라 잘 어울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잘 지냈냐는 말 한마디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영균은 태양에게 나쁜 놈이었다.
먹어.
나 오늘 맞았어.
......
맞다가 죽을 거 같아서 왔어.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거야. 김영균 씨 맞냐고. 그래서 맞다고 했더니, 돈 갚으래. 어릴 때 이후로 생사도 모르던 아빠 빚을 나보고 갚으래, 니 아빠 죽었다고. 없는 돈 모아서 조금씩 갚았어. 그 사람들이 기분 안 좋으면 찾아와서 때려. 반항하면 손에 집히는 걸로 때려. 원래는 십분 정도 그러다가 가는데, 오늘은 아닌 거야. 십 분이 넘어가고 이십분 쯤 됐겠다 싶을 때, 도망 왔어. 오늘 비 되게 많이 오잖아, 우산도 없고 몸에 힘도 잘 안 들어가고 걷기도 힘들었는데, 그 와중에 생각난 게 형네 집이다. 여기서 형이 해주는 저녁 먹고, 같이 거실에서 영화 보고, 그러다가 잠들어서 다음 날 학교 같이 가고. 그게 갑자기 생각났어, 4년 만에. 형이 너무 보고 싶었어. 갑자기 찾아와서 미친 소리해서 미안한데, 형.
아직 날 사랑해?
날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4.
당분간 여기서 지내, 밖에 나가지도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태양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영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파스. 허리 아파. 그래, 나 오늘 좀 늦어. 응. 잘 다녀와. 태양이 출근하자 방에는 썰렁한 공기만 남았다. 영균은 태양이 어제 해준 이야기를 되새겼다. 그 일 후 회장을 그만두고 조용히 학교를 다니다 졸업했고, 혜미와는 좋은 친구관계로 남았다고 했다.
5.
그렇게 이주 동안 태양의 집에서 보냈다. 늦은 시각, 태양이 집에 돌아와 넥타이를 풀며 영균에게 말했다.
이제 너네 집 가
....어?
가도 안전할 거야.
영균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언제까지 태양에게 신세를 질 수 없을뿐더러, 그 말을 하는 태양의 눈빛에 초점이 없어서, 겁을 먹었다. 태양의 말대로 안전했다. 그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에 온 영균은 탁자 위에 문서 한 장을 발견했다.
‘채무 이행 완료 확인서’
6.
한 달 뒤 기사가 났다.
[도주치상으로 사채업자 A씨 사망]
태양은 영균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