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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ly

ever after

바발

영균은 제 방 중앙에 드러누워 여유롭게 샤인머스캣을 따먹는 남자, 혹은 그 형태를 한 무언가 바라보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편하게 있어 편하게. 아 예.. 영균이 꿈지럭대며 웅크린 다리를 길게 뻗자 시뻘건 눈이 영균을 향했다. 저 허옇게 질린듯한 피부도 길쭉한 꼬리인지 뭔지도 제법 적응이 됐는데 단지 딱 하나, 저 지옥 불마냥 시뻘건 눈알은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영균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팔을 만지작대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빨간 시선이 저를 쫓아오다 툭 사라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영균은 그것마저 소름끼쳤다. 악마는 눈깔에도 뭐가 있나?


 

"야 이거 맛있다."


 

 당연히 맛있겠지 씨발, 그게 금값인데. 영균은 제가 큰맘 먹고 샀지만 맛 한 번 못 본 채 사라져가는 샤인머스캣과 내리깐 시뻘건 눈을 번갈아 째려봤다. 시선이 근처에만 가도 퍼뜩 눈을 빛내더니 이번에는 가만히 초록색 포도알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시선 덕분에 힐끔대기나 하던 악마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영균은 눈썹 뼈 아래로 깊게 푹 들어간 눈두덩이와 그 사이로 불쑥 솟은 콧대를 시선으로 훑어내리다 불쑥 물었다. 악마는 다 그렇게 생겼어요?


 

"응."


 

 잘생겼지. 말꼬리를 내리는 묘한 어투에 영균은 그냥 눈만 끔벅였다. 물어본 건가 그냥 지 혼자 자랑한 건가? 그 사이 태양이 천천히 빨간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정확히 마주치고 영균이 마른 침을 삼켰다. 왜 대답 안 해. 또 그런 말투. 아 예.. 미남이십니다. 대답을 쥐어짜낸 영균이 다시 시선을 제 발끝으로 옮겼다. 빨간 시선이 영균의 시선을 따라 영균의 발끝으로 향했다. 치렁치렁한 은붙이를 잔뜩 낀 기다란 손가락이 다시 한번 동그란 샤인머스캣 알을  떼어냈다. 아니 근데요.


 

"지어진 죄를 먹고 산다면서요."

"음식 못 먹는단 소린 안 했잖아."


 

 말 하는 꼬라지가 지옥에서 온 놈이 맞기는 한가 봐. 영균은 입을 꾹 다문 채 금값의 샤인머스캣이 막 사라진 입술만 힐끔힐끔 노려봤다.

 잠을 설쳤다. 악마를 코 앞에 두고 맘 편히 잠 잘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 것 같은데. 새벽 네 시가 넘어가자 영균은 조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엌이자 현관과 항시 이불을 깔아놓은 방 사이에는 시트지를 발라놓은 미닫이문이 있었다. 악마는 몇 시간 전 주섬주섬 이부자리를 챙기는 영균을 바라보다 스스로 문을 닫고 저와 영균의 공간을 분리했다. 영균은 콩콩 뛰어대는 심장께를 두손으로 꼭 부여잡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문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소리라고는 냉장고가 웅웅대는 소리가 전부였다. 슬쩍 몸을 일으켜 뚫어져라 노려본 불투명 시트지 건너편은 인영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꿈 꾼 거 아닐까? 영균이 문을 열어 확인해 보기 위해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기다린 듯이 유리 너머에서 꼬리가 휘적였다. 아 씨발 꿈..이 아니네.. 영균은 조용히 다시 이불을 목끝까지 덮고 누웠다.


 


 


 

 악마의 이름은 태양이라고 했다. 악마 이름이 태양이어도 되나? 악마 태양은 태연하게 뭐 어떠냐고 했다. 그래두. 덧붙이는 영균의 말에 태양은 밝은 갈색 눈동자로 가만히 영균을 바라보다 작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영균답게 사니? 영균은 입을 다물었다. 말을 진짜 좆같이 맞는 말만 하네.


 

 태양은 첫날 이후로 붉은색 눈을 하지 않았다. 한번 펄럭이면 낡은 김영균 옥탑방 다 날려버릴 것 같은 시꺼먼 날개도 길게 뻗은 뾰족한 꼬리도 감쪽같이 감췄다. 지나치게 이목을 끄는 이목구비만 제하자면 제 또래의 남자 같아진 악마에게 영균은 쉽고 빠르게 겁대가리를 상실해 갔다. 눈을 그러면 파란색으로도 바꿀 수 있어요? 태양은 대답 없이 가만히 영균을 바라봤다. 아 네 죄송. 태양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한번 깜빡이고는 영균에게 향했던 시선을 금방 거뒀다.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미적미적한 손길로 검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재밌자고 하는 짓 아니거든. 발끝을 향해 내리깔고 있던 영균의 시선이 태양의 얼굴로 향했다. 영균의 상상속 시꺼멓고 벌건 지옥에서 사는 것 치고 푸른 서울하늘 배경이 지독히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뭐가요? 나도 먹고 살아야 될 거 아냐. 어떻게..? 영균이 슬쩍 어깨를 뒤로 물렸다. 야, 사람 안 잡아 먹는다고.


 

"길바닥에 떨어진 죄나 줏어 먹으러 다녀야지."


 

 네가 나랑 계약만 해 주면 이런 짓 안 해도 되는데. 태양이 불쑥 고개를 돌려 영균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뭐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악마랑 함부로 계약을 맺어요. 이 미친놈아 하는 뒷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태양은 봉긋한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영균의 시선을 쫓았다. 갈색 눈동자에 순식간에 붉은 빛이 돌았다. 진짜 안 할래? 영균이 본능적으로 숨을 꼭 참았다. 꾹 다물어진 입술 사이로는 당연히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먼저 시선을  떼어낸 것은 태양이었다. 노란 장판이 두 겹 깔린 평상 끄트머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태양은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더 생각 해 봐. 그리고는 억지로 발을 끼워 넣은 사이즈 작은 영균의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뭘 생각 해 봐, 안 해. 영균은 이를 빡빡 갈며 머릿속으로만 되뇌었다. 숨을 턱턱 막히게 하던 빨간 눈알이 사라졌는데도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답이었다.


 

 태양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자질구레한 죄들을 쓸어 모으고 다녔다. 뒷골목에 숨어서 담배피는 고딩들이나 좁아터진 주택가 창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고함소리 같은 것들 이었다. 영균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옥탑으로 돌아온 태양은 좁은 방 안에 널브러져 있는 영균의 살림살이를 눈으로 훑었다. 영균이 이불 펴고 누워 잤던 자리에 앉아 손가락마다 빼곡히 낀 반지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갖가지 방법들의 공통점이라면 태양에게는 콧잔등 긁는 것 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라는 것이다. 벌건 눈알이나 검은 날개 따위로 겁을 줄 수도 있고 그냥 귓가에 몇 마디 속삭여서 홀려낼 수도 있었다. 태양은 반지를 쓸던 손끝을 옮겨 대충 구겨진 채로 벽에 붙은 이불을 쓸었다. 막 눈을 떴을 때 보이던 눈동자와 그 위로 흘러내리던 머리칼을 떠올렸다. 얇은 선으로 잘 빚어낸 강인한 얼굴. 공포나 속삭임으로 꾀어낸 혼미한 정신의 영균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 태양이 몸을 미끄러트려 영균의 이불 위로 고개를 뉘었다.


 


 


 


 

 태양이 영균의 집에 기생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영균은 자연스럽게 2인분의 햇반을 장바구니에 담다 문득 그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얼마나 된 거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첫날 이후로 빨간 눈알이며 날개 꼬리를 말끔히 감춰낸 태양 덕분에 영균은 종종 그 정체가 악마라는 사실도 잊었다. 그냥 같이 사는 형인 줄 알았네. 영균은 제 생각에 제가 어이없이 웃으며 스팸도 두 개를 챙겨 담았다.


 

 지구에는 언제까지 있는 거예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아 데운 햇반을 퍼먹던 태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 외계인 아니야. 대충 비슷하잖아요. 태양은 대답대신 비엔나 소세지를 젓가락으로 콕콕 찍어 두 개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 양심도 없나. 입안 가득 넣은 소세지를 우물대는 태양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있겠냐.


 

"그래서 언제까지 있냐구요."

"니가 나랑 계약 해 줄 때 까지."


 

 태양이 페트병을 들고 물을 들이켰다. 내가 끝까지 안 해주면요? 그럼 굶어 죽겠지.


 

"밥도 먹고 죄도 줏어 먹는데 왜 굶어 죽어요."

"줏어 먹는게 성에 안 찬다."

"진짜로 굶어 죽어요? 악마가?"

"굶어 죽는다기 보다는 그냥 천천히 죽어 가는 거지. 인간들처럼."


 

 영균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상 위로 조용히 내려놨다. 인간들처럼? 인간들처럼. 평생? 너네 식대로 하자면 평생. 태양이 쥐고 있던 2리터짜리 물통을 영균의 쪽으로 슬쩍 밀었다. 아님 다른 놈 찾던가. 생각에 잠긴 멍한 눈으로 물통을 쥐던 영균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태양은 마주 보는 대신 한조각 남은 계란프라이를 집어 입으로 넣었다. 난 지구에서 객사하고 싶은 마음 없거든. 태양은 여전히 영균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을 마치고 빈 햇반 그릇과 수저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영균은 물통을 손에 쥔 채로 집채만 한 검은 날개도 길쭉한 꼬리도 없는 매끈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기나 했다.


 

 솔직히 말해보자. 태양은 사실 객사 할 마음 만큼이나 죄지어줄 다른 인간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태양은 영균이 마음에 들었다. 매끈한 선의 얼굴은 덤 같은 거고, 적당히 영악하고 적당히 순한 성정이 눈에 보였다. 지옥에서 나고 자랐다고 악마들 틈바구니에서만 자란 것은 아니다. 태양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자라왔다. 백여년쯤 그런 삶을 살고 나니 몇 번 훑어보면 어떤 인간인지 측정값이 나왔다. 영균은 앞으로 남아있을 그의 짧을지 길지 모를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천국으로 올라갈지 지옥으로 떨어질지가 결정 될 것이다. 태양은 영균을 지옥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굳이 말하자면 함께 가고 싶었다. 왜 하필 김영균인가. 태양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를 김영균네로 떨어뜨린 땅의 뜻이 있을 것이다.

 한눈에 김영균을 파악한 유태양이 놓친 점은 김영균이 의외로 고집있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몇 번 꼬드기면 홀라당 넘어올 줄 알았더니 몇 달을 질질 끌었다. 태양은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살 타는 내가 자욱한 불구덩이도 인간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굴러서 다시 점처럼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뾰족한 절벽도 없는 이승이 시시했다. 속도를 높일 필요를 느꼈다. 태양은 땅에서부터 역류해 떨어지던 그 날 부터 저를 처음 본 순간 영균의 눈 안에 생긴 자그마한 감정을 알고 있었다. 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네 어쩌네 하는 건 확인사살 같은 질문일 뿐이었다. 태양은 평상에 걸터앉아 옥상 벽에 기대어 뻑뻑 담배나 피워대는 영균을 관찰하며 빙긋이 웃었다.


 


 


 


 

 영균은 악마와 함께 한 삶을 되짚어 봤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선 내 금붕어 친구를 죽여버리고 떡하니 자리 잡은 남자. 태양은 첫 눈에 영균을 겁먹게 만들었던 모든 걸 말끔히 지워버리고 영균의 삶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스며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평상위에 누워 있거나 방 안에서 영균의 오래된 교과서나 전공 책들을 뒤적이는 태양이 없는 집을 잠시 상상했다. 상상할 게 뭐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까지 몇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차마 크게 내뱉지 못하는 한숨을 코로만 숨죽여 내뱉었다. 펜 뒤 꼭지로 노트를 쿡쿡 찔러대던 게 점점 소리가 커졌는지 옆자리의 동기가 옆구리를 쿡 찍어 눈치를 줬다. 머쓱하게 멈추고 난 후 손으로 괜히 쓸어본 노트 위에는 얕게 패인 자국이 남았다. 태양이 떠나고 나면 어떤 자국이 남을 것인가. 아니야 그래도. 아니 그래도. 머릿속에 그래도의 무수한 반복이 일어났다. 그래도. 조금 보고 싶어 지지 않을까? 영균은 저도 모르게 노트 위로 보고싶 까지 써 내려가다 그 위로 줄을 죽죽 그었다. 누가 누굴 보고 싶어져? 영균은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질문에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학점 땜빵용으로 넣어둔 야간 수업은 그냥 째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 들어가 봐야 안 듣는 것만 못하겠다는 영균의 결론이었다. 하루 종일 한 온갖 생각들이 머리에 쌓여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묵직했다. 도저히 그 무게를 전부 지고 옥탑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 편의점 앞을 서성이다 맥주를 봉투 가득 샀다. 잠시 악마가 술을 먹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멍청한 생각인 것 같아 접기로 했다. 악만데 술을 못 먹겠어, 김치찌개도 쳐먹는데. 근심 걱정의 근원과 가까워 질수록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졌다. 머리 대신 손이 무거워 져서 그런가.


 

 태양이 집에 없는 건 영균의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늘상 드러누워 있던 평상에도 두 사람이 상 펴고 겨우 앉을 부엌에도 미처 못 갠 이불이 널부러진 방에도 태양이 없었다. 길바닥에 늘어진 좆만한 죄 줏어 먹으러 갔나. 영균은 맨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생각했다. 곧 돌아오겠지. 돌아오겠지? 딴 놈 찾던가. 세상사 그 무엇도 관심 없는 얼굴과 말투로 덤덤히 읊던 태양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이 씨발 나 악마한테 홀렸나봐. 영균이 봉지를 부스럭대며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태양은 정확히 영균의 야간 수업이 끝날 시간에 현관문을 열었다. 귀신같네. 현관문 소리에 시간을 확인한 영균은 앉은 채 비틀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일찍 왔네. 놀란 기색이라곤 없이 태연히 영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 태양의 입꼬리가 양 쪽 비죽 올라갔다.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영균은 발견하지 못했다. 왜 웃냐고 따지는 대신 어디, 어디 갔다 왔어요 하고 웅얼대며 묻는 것이 전부였다. 태양은 영균의 앞에 널부러진 빈 캔들을 일렬로 세우며 답했다. 어디 갔다 왔을 것 같아? 태양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영균은 제 앞에 하나 남은 캔을 집어 들고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캔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따라 내려간 영균의 고개가 들어 올려 질 생각을 않았다. 이 고집쟁이 인간은 태양의 짐작보다도 더 순진한 편이었다.


 

"영균아."


 

 태양이 영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영균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 졌다. 태양과 마주한 영균의 시선이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처럼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태양은 제가 영균의 집으로 떨어지지 않고 이대로 내버려 뒀으면 김영균 죽은 후에 하늘에서 데려갔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딴 생각을 해도 태양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었다. 더 이상 그딴 생각은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없으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어?"


 

 태양이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곧은 시선을 어지럽게 받아내던 영균이 다시 고개를 툭 떨궜다. 있잖아요.


 

"그냥 계속 나랑 살면 안 돼요? 그냥, 그때 말한 것 처럼. 인간들 처럼, 나 처럼."


 

 그냥 여기서 같이 밥 먹구 같이 자구, 그렇게 천천히 죽으면 안 돼요? 이어지는 영균의 말꼬리가 벌벌 떨렸다. 태양을 기다리며 맥주 캔을 까는 사이 머리를 잠식한 두려움은 저를 죄짓게 만들기 위해 나타난 빨간 눈알의 악마의 존재가 아닌 그 악마가 사라지고 혼자 남을 집이었다. 안 갔으면 좋겠어요. 태양이 정수리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영균아.


 

"안 돼."


 

 영균에게 가혹한 대답을 뱉으며 태양은 결국 환하게 웃었다. 나는 돌아갈 거야, 내 고향으로. 태양이 영균에게로 팔을 뻗었다.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영균의 눈썹과 눈꼬리가 일그러졌다. 왜요. 태양은 대답 대신 붙잡은 턱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중심을 잡으려 바닥을 짚은 영균의 손에 닿은 맥주캔이 쓰러지며 바닥과 영균의 바지 끝자락을 적셨다. 발목께에 불쾌한 축축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은 금세 다시 영균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입술이 벌어지자 미끈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영균은 김빠진 맥주 위로 몸을 뉘이며 태양의 목으로 팔을 걸었다.


 

 입맞춤 뒤로는 모든 것이 쉬웠다. 술에 취한 뜨끈한 몸은 태양의 차가운 손에 끼워진 더 차가운 금속붙이들이 닿을 때 마다 파들파들 떨렸다. 바닥과 영균의 맨 등에 아무렇게나 비벼진 맥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열기로 발갛게 달아오른 몸을 쓸어내리며 태양은 영균이 마신 술이 온갖 체액을 통해 저에게로 넘어 온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아득하게 몽롱해졌다. 영균아. 귀에다 입술을 붙이고 숨소리를 내며 속삭이자 영균이 또 몸을 떨었다.


 

"넌 나랑 같이 가게 될 거야."


 


 


 


 

 태양은 여전히 낮이면 길로 나섰다가 영균이 수업을 마칠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그 사이 영균은 빈 노트 위에 펜 뒤꽁무니로 찍은 자국이나 아무렇게나 죽죽 그은 낙서나 늘여갔다. 오늘 당장 집에 갔는데 태양이 없으면? 그런 생각이 들면 수업내내 다리를 달달 떨다 끝나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영균의 오후 수업 출결이 엉망이 되어갔다. 태양이 영균을 기다리는 날 보다 영균이 태양을 기다리는 날들이 늘어갔다. 영균은 그 사실을 대낮부터 몇 시간이나 빈방에 멍하니 드러누워 있다 깨달았다. 악마새끼, 나한테 왜 이러는데. 코끝과 눈으로 열이 몰렸다. 좁은 방의 딱 한 쪽 벽면에 붙은 창으로 노을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이 이 방의 유일한 태양이었다. 씹새끼. 개새끼 소새끼. 영균은 옷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다 축축한 소매를 붙잡고 꺽꺽댔다. 태양은 방에서 태양 빛이 자취를 감출 때 즈음에나 나타났다. 이미 마른자국 가득한 얼굴을 눅눅한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영균이 몸을 일으켰다.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오던 태양이 걸음을 멈췄다. 울었어? 네. 왜? 영균은 대답 대신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할게요."


 

 목적어 빠진 영균의 짧은 문장을 태양은 단번에 이해했다. 태양이 눈끝을 끌어 내려 접으며 웃었다. 영균아.


 

"넌 못 해."


 

 태양이 얼빠진 채 선 영균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웃음의 흔적이 사라진 얼굴로 네모난 담배곽을 꺼내 들고는 영균에게 등을 돌렸다. 영균은 다시 현관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가만히 선 채 바라봤다. 왜? 여태까진 해달라고 유난이더니 왜 이제 와서 난 못 해? 내가 못하면? 영균은 잠시 검은 날개를 펴고 어느 다른 옥탑방 마당 위로 내려앉는 태양을 상상했다. 날뛰는 심장 박동에 몸이 비틀 댈 지경이었다. 저도 모르는 새 꾹 쥔 주먹이 벌벌 떨렸다. 내가 왜 못해. 태양이 나선 현관문을 향해 발걸음을 크게 떼어냈다.

 태양은 평상에 걸터앉아 영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대로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연기를 깊게 들이 마셨다 검보랏빛 하늘 위로 뿜어냈다. 뛰쳐나오려나 그대로 얼어 있으려나. 생각을 마치자마자 현관문이 활짝 열어 젖혀졌다. 나왔네. 맨발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영균을 위해 태양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언제는 하자면서요. 생각해 보라면서."

"영균아. 너 사람 죽일 수 있어?"


 

 코앞에 선 태양에게 느껴질 정도로 펄펄 열기를 뿜어내던 몸이 순식간에 식었다. 태양이 느리게 손을 들어 올려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시 들이마시고. 이번에는 주황색 불빛 빼곡한 도심 위로 연기를 뿜어냈다. 해 봐. 태양이 영균의 한 쪽 손을 붙잡아 제 목에다 가져다 댔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은 태양이 손을 놓자 덜덜 떨려왔다. 태양이 두모금 밖에 빨지 않은 장초를 바닥으로 툭 던졌다. 너 내가 다른 사람한테 가는 거 싫지 않아? 덜덜 떨리는 손 끝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 난 안 죽잖아."


 

 태양이 반대쪽 손도 붙잡아 목에 가져다 댔다. 약한 힘을 가하는 손은 계속 태양의 목을 울리도록 떨려왔다. 태양이 손을 떼어내자 영균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태양은 자국 하나 남지 않은 매끈한 목을 좌우로 길게 뻗어 늘였다. 그리고 계약 끝나고 나서 나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면 어떡하려구 그래. 영균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진 손을 따라 툭 떨궈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정수리를 바라보며 태양의 입꼬리가 광대를 향해 올라 붙었다.


 

"다른 방법이 있어."


 

 태양이 영균의 턱을 가볍게 잡고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밝은 갈색 눈동자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태양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영균의 맨발이 이끌리듯 태양을 따라 움직였다.


 

"나랑 같이 가자."


 

 옥상 담벼락 끝까지 움직여 등을 붙이고 섰던 태양이 순식간에 몸을 뒤로 젖혔다. 영균이 손을 뻗었을 때에는 태양은 이미 담벼락 아래로 사라진 후였다. 허공에 뻗은 영균의 손 끝에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새빨간 십자가가 비죽 솟아 있었다. 영균은 뭣 모르던 초딩시절 과자 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일요일마다 찾아갔던 교회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넌 나랑 같이 가게 될 거야.


 

 끈적한 목소리가 귓가에 따라붙었다. 태양이 떨어진 서쪽 하늘로 영균의 몸이 기울었다.

無明長夜:무명장야

𝐓𝐀𝐍𝐆𝐘𝐔𝐍 𝐂𝐎𝐋𝐋𝐀𝐁𝐎𝐑𝐀𝐓𝐈𝐎𝐍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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