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불가촉 우주

스컬핀

전기가 또 먹통이다. 더 빠르게 눌러본다고 나간 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달각달각달각 신경질적으로 스위치와 씨름하다 한숨 한 번과 함께 결국 포기해버리고 만다. 되는대로 외투 주머니를 쑤셔 봐도 잡히는 건 구겨진 영수증 빈 테이블에서 집어 나온 병뚜껑 뿐이라 영균은 대강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멍청히 허공을 응시하는 채로 있었다.

 

 

함부로 침대까지 움직여보려다 아무렇게나 세워뒀던 캐리어를 걷어찼다. 뭔지도 모르겠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은 벌레 한 떼 후다닥 흩어지는 소리가 조용한 틈으로 퍼진다. 소름끼치게 만드는 것들은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근데 거지같이 렌트 비싼 홍콩 땅에 무일푼으로 발 붙이고 있으려면 여기 말고는 선택지가 없고......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언젠가 3차로 간 닭도리탕 집에서 만난 눈빛 흐리멍텅한 아무개가 재미로 봐 준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있다고는 했다.

그 땐 어어 저 어릴 때 이사 많이 다녔어요 하고 말았는데 다 커서가 절정일 줄은 몰랐지.

 

앞으로의 꼴이 기대가 되네 얼마나 더 쓰레기 같이 삶이 번질지 언젠가는 좀 나아질 거라는 기대는 하나도 없이.

 

 

 

 

말 한 마디 못 해도 곱게 거둬 먹여살려줄 유태양이 없어 유투브 무료 강좌 뒤져가며 나름대로 빡세게 익혀 본 광둥어는 별 쓸모도 없었다.

종일 하는 일이라곤 어정쩡하게 벽 근처에 그림자처럼 서 있다 빈 테이블 정리하고 취객이 술이며 안주 따위 쏟아놓은 바닥 문질러 닦아내고 누군가 무신경하게 말 걸어오면 아가리 싸물고 예쁘게 웃기만 하거나 관광객 대상으로 어눌한 영어 조금 하는 게 다였다. 가게 입지상 영어 통할만 한 사람보다 한국인 상대할 일이 더 많았다.

 

그 발음 못 알아듣겠는 이름의 영화배우 닮았단 것도 광둥어 못 하는 것도 다 좋다길래 윤리적으로 문제되는 업소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랬어도 도망칠 구석 없었겠지만, 운 나쁜 것 치곤 운이 좋아서.
(걔가 지금 날 다시 보게 되면 어떤 말을 할까?)

 


시간이 꽤 오래 지났지만 아직도 유태양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미련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걔 옆에선 아무것도 못 하던 새끼가 그래도 좀 번듯하게 사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유태양은 아마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하게 잘 지낼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러지 않을 수도,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홍콩에서도 아마 끝내는 정착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내내 떠돌면서 걔 아닌 아무와도 함께할 수 없을 게 확실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순응 된 시야로 영균보다도 더 오랜 세월 지나왔을 것만 같은 요란한 장미 무늬 커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커튼을 당기고 철창 너머로 창을 열어 젖혔다. 창가로 촛불 켜놓은 집이 왕왕 있어 옅게 빛이 들어왔다. 영균은 그 희미한 조도를 등불 삼아 서랍을 헤집었다. 반쯤 타고 남은 양초를 꺼낸다. 오래 묵은 성냥이 눅눅하게 젖어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잠든 사이 불이라도 옮겨 붙으면 어쩌나, 레고 블록처럼 높은 밀도로 다닥다닥 들러붙은 좁은 방들은 순식간에 가깝고 낯선 이웃들을 화염 속으로 몰아넣고 나도 그 잿더미 중 하나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이 잠깐 머릿속을 스친다. 그런다고 지금과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얼마나 긴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다시 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땅에 돌아가서 발 붙일 일 없었다.

 

 


비도 안 왔는데 꿉꿉하게 젖은 냄새 물씬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얕은 스프링 반동에 다리 여럿 달린 불청객들 흩어지는 소리가 스산하게 퍼졌다.

 

 


주문처럼 되새긴다. 어쨌든 걔는 나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도망친 게 나고 걔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가 끝난 건 아니니까.
밋밋하게 심지 타는 냄새 맡으며 잠을 청한다. 김영균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삼 년 만났고 이 년 반 동거했다.

 

이 년은 마포구 창천동 반지하 투룸에서 살았고 반 년은 도쿄 야자이케의 사십 년 쯤 되어 보이는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살 안 부대낄래야 안 부대낄 수 없는 공간에 구겨져 사는 것도 낭만이라면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떠올리게 되는 것은 처음 걔네 집에 짐을 풀던 사 개월 쯤이다. 슬슬 익숙함이 더 커질 무렵에 생긴 관계 변화였고 아침에 눈 떴을 때 걔 새카만 눈썹 아래 굳게 닫힌 눈꺼풀부터 보이는 것 부터 말도 안 되게 단 맛 나는 김치찌개 네 걸음 걸으면 현관부터 거실 끝까지 닿을 수 있는 손바닥 만 한 집에서 왈츠랍시고 서로 발이나 밟다가 러그 위에서 얼토당토 않게 바지 끌어내리던 것 까지 다 분에 넘치도록 좋았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길지도 않은 기억으로 이 년 넘게 숨죽여 보냈다. 연애란 건 그런 것 같애. 김영균은 단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유력한 지성체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감정을 감히 결론짓는다. 연애란 건 시작부터 아주 짧은 기간동안 쌓아올린 관계를 최대치로 하고, 그 후의 남은 시간은 계속 그것들을 갉아먹는 것일 뿐이다. 그게 얼마나 길어지는지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관계를 소진하는지에 달려 있다. 쯧----누군가 혀를 찬다.

 


창천동에서 유태양은, 대학을 다니고 춤을 추러 다녔고 대학에서 춤을 추러 다녔다. 그리고 김영균은 걔가 무용단 단원들 뿐 아니라 이런저런 예술하는 사람들 커뮤니티에 속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만나고 밖으로 나도는게 꼴보기 싫은 대충......그냥 아무 청춘이었다. 처음엔 질투인 줄 알았는데 그냥 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걔랑 나 사이에 이기고 지는 게 뭐가 중요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유태양은 그런 생각 한 번 한 적 없었을 텐데 그 때 김영균은 그랬다. 영균은 태양이 학교와 무용단 일로 집을 비우는 동안 힙합 공연 좀 한다는 아는 형들의 아는 형들을 질리도록 졸졸 쫓아다녔다.

 

 

귀찮게 여기는 눈빛들을 눈치 밥 말아먹은 척 꼽사리 몇 번 꼈더니 어느 순간 팀이 돼있었다.

 

맨날 술이나 퍼먹고 다니면서 기억력도 술에 같이 말아 드셨는지 귀찮은 놈이라고 욕하던 건 다 잊어버리고 이 새끼 졸라 진국이야 그랬다. 그러다 보니까 좀 진짜로 힙합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유태양은 뭔가 눈부신 인간 같은데 나만 개좆밥인 게 끔찍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진짜 음악을 존나게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끝없이 자기암시 한 결과로.

 

 

 


유태양은 그렇게 사귄 김영균 친구들을 다 마음에 안 들어했다. 서로 애인이라고 제대로 말 할 수도 없는 사이였다. 태양이 어쩌다 만취한 영균 주워가느라 들릴 때마다 대놓고 훑어 보고 뒷얘기 하던 걸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알았다. 손톱때 잔뜩 낀 문신근육돼지 팔뚝으로 어깨 툭 치면서, 영균이 니 룸메이트 게이새끼인 것 같은데 그 집 나오는 게 좋겠단 얘길 nnn번째 술자리에서 들었을 때 김영균은. 우리 형 여자에 존나 환장해요 몸 쓰는 사람들 육욕 다들 알죠(이 대목은 얼추 사실이었다) 대물 졸라 휘둘러 의자왕이야 씨발(저급한 손동작 곁들여 가며)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없을 무용담들 유태양이 전해 들었어도 하나도 안 고마워했을 방어적인 이야기들 흥분해 떠들어대면서 목소리 높여 웃고, 걔가 진짜 머리 끝까지 화 날 때까지 술 들이붓고 날 다 밝아서야 둘이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힙합퍼 김영균의 게이 룸메이트는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왜 연락도 안 받고 이제 들어와.

 

술 냄새 담배 냄새에 절어서 침대까지 늘어선 가구 여섯개에 무릎을 다 쳐박고 기어 들어온 영균에게 바보 같은 목소리로 따지려는 걸 끈적한 손바닥 씻지도 않고 양 뺨 덥썩 붙잡아 코 끝을 맞댔다. 그러면 사람이 또 순해가지고 화 좀 내보려다가도 쉽게 녹아 앞으론 연락이라도 좀 제 때 받아 달라고 머리나 좀 쓰다듬어 주고 마니까. 바본가, 아니면 이런 게 사랑인가. 김영균은 그 때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지저분한 꼴만 보여주고, 그런 세상에서 유태양이 나를 제 품 속에 이렇게까지 꽁꽁 숨겨 놓으려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형은 나를 진짜 징그러울 만큼 존나 아끼고 있구나? 영균의 취한 머릿속에서 논리가 널을 뛴다. 안면 근육이 다 풀려서 실실 웃음이 샜다. 왜 웃어, 씻기나 해. 코 앞의 유태양이 눈살 찌푸리고 힘없이 밀어내는 건 모르고 알코올 냄새 풍기는 입술이나 부딪혔다. 날 진짜 사랑하는구나. 그게 유태양이구나. 김영균을 사랑하는 게 유태양의 본질이구나......그런 결론.
삐--------ㅡerrorㅡ

 

 



그 짓도 오래 못 했다.

유태양은 슬슬 돈 쪼들려서 학교 그만둘 각을 세웠다. 아무래도 예술은 돈이 많이 드는데 반해 돈벌이가 안 되니까. 시작할 때는 다들 지가 니진스키라도 되는 줄 알지 근데 세상에 나타나거나 나타나려다 사라진 무용수는 억이 넘었을 거고 니진스키는 하나였다. 거듭되는 레슨에서 돈 퍼부어 배우는 건 학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재능 없음이다. 유태양은 비관적인 인간이 아니었는데 객관적인 인간은 됐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상황이 좀 달랐으면 몰랐겠지만, 유지할 자본이 바닥난 상태에서 계속할 이유는 없다고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의논할 요량으로 꺼낸 말도 아니고 이미 속으로 답을 다 낸 상태였다. 영균은 그 말 듣고 걔가 춤 추는 모습 제대로 본 적도 없고 그다지 좋아한 적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꿈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느냐고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따졌다. 태양은 고개를 딱 10도 오른쪽으로 비틀고 맹한 표정으로 영균을 올려다 봤다.
강사라도 하면.


대학 졸업도 제대로 못 한 걸 누가 강사 써주냐.
돈 벌어서 졸업하면 되잖아 내가 학비 대줄게 알바라도 늘려서.

 


유태양은 김영균이 끝까지 고집 꺾을 생각을 안 하니까......결국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 끄덕여 시끄럽게 땍땍이는 주둥이 틀어막긴 했는데, 그 때 영균이 고양이 손으로 코딱지 만큼 수입 늘려 왔어도 하등 도움 안 되었을 것을, 그래서 다시는 대학에 돌아가지 못할 걸 진작 알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 그 주 주말 영균은 태양이 이른 새벽 의류수거함에다 몰래 연습복을 다 갖다 던지는 걸 봤다.


유태양 춤 그만두니까 김영균도 음악에 관심이 다 떨어졌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힙찔이 놀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영균은 조금 홀가분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기분이기도 했고 어울리던 크루들 태양이 마음에 안 들어했던 만큼 영균에게도 껄끄러운 유형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음악보다도 여자 얘기에 미치는 것도 싫었고 암암리에 대마 돌려피우는 티 내는 것도 간 쫄려서 빨리 발 빼고 싶었다. 근데 영균이 표면적으로만 태양의 춤에 관심 줬던 것과 다르게 태양은 눈에 띄게 속상해 하면서 수준과 음질 모든 게 다 떨어지는 김영균 사운드 클라우드 여섯 곡을 질리도록 반복재생해 듣기 시작했다. 왜 나는 네 음악들 되게 좋았는데 계속 좀 해보징...... 그래서 영균은 유태양 한 사람만을 위한 원 맨 콘서트를 종종 열었다. 십삼 평짜리 창천동 반지하 거실 콘서트홀에서, 조명은 화장실 주황빛 등 하나 켜 놓고 가끔은 향초 두어 개로 분위기 더하고 세트리스트는 꼭 여섯 곡 뿐으로 순서는 랜덤재생이 점지해주는 데에 맡겼다. 태양은 래퍼 김영균이 가사를 절어도 삑사리가 나도 박수 깔짝깔짝 치며 좋아했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공연비로 숨막히도록 길게 입을 맞춰줬다.

 


영균은 태양이 관중 빽빽한 힙합 클럽 속의 김영균보다 태양만을 위해 공연하는 김영균을 더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실은 태양이, 내 세계가 넓어지는 걸 무서워하고 있던 거라고 넘겨짚었다. 우리 둘 만의 좁은 섬 같은 세계가 좋았던 거야 왜냐하면 걔는 나를 너무 사랑하니까, 유태양은 김영균만 있으면 되니까, 반대로 말하면 김영균 없이는 안 되니까.
(사실은 그 반대 아니야, 내가 유태양 없이 안 되니까 걔가 더 나은 세계로 영역을 넓혀가는 걸 두려워 했던 것 아냐?)
(솔직히 유태양이 춤 그만둔다 했을 때 무슨 생각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누구야?----누군데 자꾸 말을 거는 거야?)



반면 구질구질한 기억들은 금세 잊힌다. 영균은 살 부러진 우산 하나 덜렁 든 채 태양을 기다리던 신주쿠 거리가 어땠는지 도쿄타워 전망대에 올라가보기로 약속했던 날 왜 그러지 못하고 지하철 거꾸로 타고 돌아왔는지 왜 바다만 떠올리면 유태양의 뒤통수 쳐다보던 프레임들만 이렇게 늘어지는지에 대해서는......기억하고 싶지 않다.

 


반 년도 안 지나 태양이 먼저 함께 도쿄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둘 다 그나마라도 하던 것 그만 두고 나니 서울 땅에서 편돌이나 불판닦이 말고는 딱히 할 만한 게 없었다. 영균은 걔가 어릴 때부터 종종 일본으로 오가던 걸 알았다. 그래서 무슨 연고가 있거나 뾰족한 수가 있는 줄 알고 아무런 고민도 안 하고 덜컥 그러자고 했는데, 스카이스캐너 끝까지 뒤져 편도 육 만원 하는 피치항공 타고 나리타 공항 내리고 나서 알게 된 사실 : 일본 가서도 할 수 있을 만한 건 편돌이나 불판닦이 비슷한 것들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선택지는 더 좁았다. 유태양에게 혹처럼 딸린 김영균이 일본어를 단 한 마디도 못했기 때문이다.

 


원래도 그다지 쓸모 있진 않았던 영균은 그 곳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못 했고, 춤을 그만둔 상태의 태양도 그다지 쓸모 있지 않은 신세로 전락했다. 태양은 집에서 지하철 타고 한시간 조금 더 가야 있는 히가시신주쿠 역 인근 라멘집에서 파트타임을 시작했다. 반지하였어도 퍽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던 창천동 집과는 달리 덥고 습하고 낡았던 도쿄 집은 태어나 처음 보는 벌레들과 낯선 소음들에 익숙해져야만 했고 태양은 일 마치고 잔뜩 지쳐서도 새벽마다 자꾸 깼다. 그럴 때면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하고 머리맡을 한참 서성이다 동틀 즈음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다. 동앗줄 마냥 영균의 손을 꼭 붙잡고서, 영균의 모든 쓸모가 거기에 있다는 것처럼.

 

 


영균은 걔가 그래도 현상에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김영균이 계속 옆에 있었으니까, 이제서야 비로소 세상 속에 둘만 남아 서로가 서로에게만 기댈 수 있게 됐으니까. 영균은 태양이 진짜로 김영균만 있으면 되는 인간인 줄 단단히 착각했고 그래서 존나 아무런 고민도 안 하고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얼마 되지 않는 좋은 기억들은 빠른 속도로 좀먹어 사라지고 있었다.


애새끼 같은 김영균 받아주느라 유태양이 지나치게 어른인 척 하고 있던 것도 문제였지, 사실 걔도 애새끼여서 어른인 척 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거야. 자기가 잃은 모든 게 억울했을 거고 그게 김영균 탓이 아니라고는 해도 분노가 향할 곳이 없었으니까, 온 우주가 둘 뿐으로 좁아진 이상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고......나는 그런데도 왜 끝까지 우리가 완전한 상태라고 믿었을까? (멍청하게.)

 



도쿄에서는 유독 많이 싸웠다. 기억들이 길거리에서 불법으로 구워 파는 비디오 테이프처럼 이 장면 저 장면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어 어느 한 순간을 골라내기 어렵다. 다툼은 늘 패턴이 비슷하니 그럴 법도 했다. 언제 어디서 싸운 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뒤늦게 깨달은 건 기억속의 태양이 조금씩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


유태양의 등--하면은. 우리 일본 온 지 반 년이나 됐는데 아직 오다이바를 한 번 못 가봤네 편의점 음식으로 조촐하게 저녁 식사 때우다 나온 이야기에 대뜸 지하철 타고 간 곳은 쇼핑에 취미 없는 둘에겐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고 겁나 큰 건담은 태양에게도 영균에게도 어린시절 추억이랄 만 한 게 아니었다. 역에서 내려 레인보우 브릿지를 볼 수 있는 전망 데크까지, 전망 데크에서부터 긴 해변을 따라 습관처럼 손 맞잡고 걷는 내내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영균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없어 해 줄 말이 없었고 태양은 왼쪽에 서서 왼쪽을 보고 걷고 있었다. 그 곳에 바다가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조명도 거진 소등되어 그저 암흑이었다. 태양은 암흑을 보고 있었다.
영균은 아직도 침사추이의 부두에 멍청하게 서 있을 때면 당장이라도 태양이 잡은 손을 뿌리치고 새카만 바다로 뛰어들 것만 같은 착각에 스스로 주먹을 세게 말아쥔다. 이젠 그럴 사람이 옆에 있지도 않은데도.

 





그래도 마지막 순간만은 선명했다. 태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같은 영균을 내버려두고 집을 나간 상태였다. 어차피 영균 혼자서는 그 집의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없으니 곧 집을 비워야 했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유태양이 필요했다기보다 김영균 삶의 일부로 유태양이 필요한 게 더 컸다. 이 문장의 앞뒤가 뭐가 다른 건지는 몰라도. 아무리 띨띨해도 집 돌아가는 길은 꿰고 있는 강아지 마냥 유태양 일 하던 가게가 어디 즈음에 위치했는지 대강 꿰고 있었다. 히가시신주쿠 역 근처 골목을 한 시간 뒤져 나무 테이블 문질러 닦던 유태양을 찾아냈다.
일그러지는 표정은 보지도 못하고 영균은 그 마주침이 제법, 운명같다고 생각해버린다. 눈이라도 좀 내렸으면 더 멋있는 등장이었을 걸. 하는 바보같은 생각도.


영균의 음식을 태양이 서빙했고 영균은 눈인사도 없이 돌아서려는 태양의 앞치마를 붙잡았다. 태양은 놓으라는 말도 안 했다. 그냥 지그시 쳐다봤다. 영균에게 쏟아내 왔던 모든 부정적인 말들에 스스로 이미 질려서 다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처럼 그랬다. 영균의 입이 겁도 없이 움직인다. 형은 날 형보다 더 사랑하잖아.


형은 그래도 어떻게든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어.
영균아. 처음으로 유태양의 목소리를 사념 없이 듣는다.


나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웃자란 앞머리 아래로 좀처럼 찡그려지지는 일 없던 태양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어서 영균은 조금 쫄았다. 풀어 던져진 앞치마 끈이 라멘 육수로 내려앉았다. 영균은 바보처럼 앞치마 끝자락을 손끝에 쥐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로 시작한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태양의 입 안으로 삼켜진다.


영균은 그제서야, 이제껏 아무리 제 멋대로 굴어대도 걔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던 건 그를 향한 거대한 사랑으로 정말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김영균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무렇지 않아져야만 한다고 스스로 세뇌하고 있던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태양이 주방 향해 잘 모르는 일본어로 소리치더니 폭풍처럼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동료 중 하나가 따라나가려는 것 같았는데 평소엔 그렇게 평온하게 굴더니 이럴 때에만 재빨라서 뒤돌아 보지도 않았다. 영균도 라멘 입에 쑤셔넣으려다 말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지갑 열었을 때 죄 짤짤이 뿐이고 오천엔 지폐 한 장 있었는데, 동전 세고 있다가는 유태양이 지구 반대편까지 사라져버릴 것 같아 눈물 머금고 던지듯 오천엔 꺼내 놓고 달려 나왔다. 입 안에 채 씹지도 못한 면발이 가득해서 벌써 콩알 만큼 멀어진 걸 불러 세우지도 못했다. 영균은 겁나 뛰었다. 뭘 먹다 말고 뛰고 있으려니 배도 아프고 모양도 빠져서 적반하장으로 야마가 살짝 돌았다.


아니 형 어디 가는데 일하는 중이었잖아.


방금 그만뒀어.


왜!


네가 나 저기서 일하는 거 아니까.


......왜 그렇게까지 해?


더 심하게 해줘?


......


나는 네가 나랑 같은 땅 밟고 있는 게 끔찍해서 죽고 싶어.


그래서 더 붙잡지도 못했다.
김영균은 그 날로 짧다면 짧은 일본 생활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유태양 없이는 아무것도 못 했다. 그 흔한 인삿말 하나도 여지껏 헛갈려서 아침에도 곤니찌와 저녁에도 곤니찌와 하던 게 고작 지난 달이었고 대화 좀 길어지면 땀 삐질삐질 흘리며 초등학생 수준도 못 되는 영어 짜내서 말해야 했다. 딱히 음악 계속하려던 것도 아니면서 음악에는 국경도 언어도 없어 변명하며 어학원 다니는 걸 차일피일 미뤘고 유태양도 그딴 헛소리 들었을 때 별 말 없이 웃어넘겼지만......그 때 씨발 정신 좀 차리라고 등짝 한 대만 쳐 주지, 언젠가 혼자서라도 알아서 살 수 있게, 이렇게 매몰차게 두고 갈 거였으면.
김영균은 지가 잘못해서 끝났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 인정하는 것 하나가 무서워서 남탓도 잘 했다.



잘만 하면 그렇게 평생 사랑해줄 수 있던 애를 한계치까지 괴롭힌거지, 무한한 총량의 애정을 고작 삼 년 만에 내핵까지 득득 긁어서 다 끝장 내버린 거야 내 손으로 그냥......
자의식 과잉 오졌다......
네가 그렇게까지 잘난 것 같냐 누구 한 사람한테 그런 영향을 끼칠 만큼? 강찬희가 천 원 짜리 노가리 뜯으며 비웃는다. 초월적인 존재는 늘 가장 가까운 이의 입을 빌어 가르침을 전하곤 한다.
그건 교만이고.

 


술집은 오래된 주택 건물 마당에다 천막 쳐서 테이블 몇 개 불법으로 깔아놓은 모양이라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발치가 휑하니 시려왔다. 유태양 일 하던 가게에서 라멘 한 그릇에 데운 정종 한 잔 얻어 먹으면 딱일 날씬데 그럴 유태양도 없고 무엇보다 서울이었다. 눈 앞의 강찬희가 손 번쩍 들어 진로 한 병에 생맥주 두 잔을 추가한다. 몇 시나 됐다고 벌써 코 끝이 시큰했다. 어린 애들이 안주도 없이 뭔 술을 이렇게 퍼먹어. 지나가듯 하는 말이 귀에 꽂힌다. 짜파게티 하나 더 시키면 딱 맞을 것 같은데 그 때 팔백오십 엔 짜리 라멘 두 젓가락 먹은데다 오천 엔 버리고 와서 그런가 돈이 모자라네. 오백 미리에 삼천 원 하는 생맥주 잔에 비율 생각 않고 소주 대강 섞어 다섯 잔 째 들이부으면서 하는 생각. 그래 확실히 인생 살면서 어쩌다 길에 흘린 사만 원을 두고두고 아까워 하는 인생이 썩 잘날 것은 없어 보였다. 일본 반 년 살면서 히라가나 가타카나 제대로 못 읽는 무자비한 언어 실력 역시도.

 


근데 그래도 그렇게 보잘것 없어도 나를 걔는 존나 사랑했다니까......이씹새끼야? 나를 그냥 멍청이로 보는 너랑은 다르게. 난롯불에 뜨끈하게 달궈진 플라스틱 테이블을 온 뺨으로 느낀다. 계절감 안 맞는 컨버스 안에 담긴 발은 얼어 터지기 직전이고 난로에 바짝 붙은 오른쪽 어깨랑 뺨은 곧 불 붙을 듯 했다. 배고픈 사랑이나 사랑에 배고픈 걸, 아마 사랑도 모를 거고 배고픈 것도 모를 강찬희는 그저 노가리나 서비스 오뎅 국물 같은 걸 맛없게 깨작이다 혀나 찬다. 등신 졸라 취했네. 모든 것을 단순 취기로 치부해버리면 저렇게 삶 전체가 편해지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러질 못하는 사람이나 대가리 깨면서 평생 고민하는 거고 그래서 나만 호빵맨 마냥 머리가 뻑뻑 부스러지고......


나 홍콩에 가야겠다.
뭔 소리야 또.


걔 일 그만뒀으니까 이제 한국 들어올텐데 이제는 내가 먼저 꺼져주는 게 진짜 사랑이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라도, 남자답게에. 와 너 진짜 병신같다......기억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마디가 강찬희가 한 말인지 김영균 마음의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랬고 아침에 진동하는 대가리 붙잡고 눈 뜬 영균은 모텔 변기에 대고 필름 끊긴 사이 주워먹은 짜파게티 토하다가 통장 바닥에 남은 마지막 잔고 털어 비행기표를 긁었다. 술값은 강찬희가 말없이 내고 영균이 떠날 때까지 한 마디도 안했다. 사랑에 대한 공감능력은 없어도 눈치는 있어서 그랬다. 휑한 평일 오전 공항에 멀뚱이 혼자 배웅 나와서는
언제 한국 들어올 거면 제니 쿠키 사들고 와라.
그런 말은 했다.



김영균은 금성무도 아니면서 공중전화기 앞에 습관처럼 멈춰서서 잊히지도 않는 번호를 기계적으로 누른다. 오픈형 주방의 파키스탄계 직원 하나가 규칙적인 시간대 맞춰 등장하곤 하는 오랜 광인들 중 하나 보듯 영균을 슬쩍 흘겨 보다가, 다시 달려드는 날벌레에나 시선을 준다. 가진 동전이 바닥날 쯤 슬슬 술이 깰 때 쯤 되면 새벽잠을 방해받아 짜증과 피로가 덕지덕지 끼인 목소리의 남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응답한다.


유태양 씨 댁인가요.


저는 야마다고 그 사람 이사 갔어요. 벌써 오십 번은 더 말 했잖아요.


다시 안 돌아올까요?


제발 정신 차리고 자기 인생 살아요.


......


이 말도 오십 번은 더 했잖아요.
야마다는 전화를 끊는다.



김영균은 볕이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문득 시선을 느끼고 눈을 뜬다. 한국에서부터 즐겨 쓰던 회색 비니를 푹 눌러 쓴 태양이 양 팔 뻗으면 꽉 들어찰 비좁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진짜 집 꼴이 이게 뭐냐?


시비 걸듯 말하면서도 제 집인 양 아무렇게나 널린 옷가지나 과자 봉지 등을 집어 올리기 시작한다. 강찬희가 너 여기 산다던데, 미처 묻지도 않은 말에 먼저 대답을 해서, 강찬희는 어떻게 알았지 내가 연락을 했던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처음 도착했을 무렵에 한 번쯤 통화한 것 같기도 했다. 제니쿠키 한국에도 판대 게으른 새꺄 라고 말해주려고. 걔가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할 만큼 섬세한 인간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지 싶었는데. 영균이 팔꿈치 세워 몸을 일으킨다. 기억 속에서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태양의 얼굴이 실감이 안 나 한참을 말 없이 뜯어본다.
형 나 그래도 그 동안 잘 살고 있었어.
......
대충 나 먹고 살 만큼은 돼 같이 사는 건 어렵겠지만.......
형 춤 다시 추게 해 준다는 약속도......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했어.
태양이 긴 침묵 끝에 짧게 대답한다. 입술 끝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나.


유태양이 여기에 올 만 한 타당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의 재패니즈 드림이 김영균이라는 종양 덩어리로 인해 대차게 망해버렸으니 아마 서울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컸고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도쿄에서 어떻게 아등바등 살아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마담 제니 양이 유태양을 본다면 마음에 들어라 하겠지만 왜냐하며는 영균보다는 이 쪽이 조금 더 홍콩사람 좋아하는 무슨무슨 배우들을 닮은 얼굴이라서, 그렇지만 그것까지 그가 알고 있을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김영균만을 보고 홍콩까지 온 걸 텐데. 영균이 웃는다. 태양이 무릎으로 침대를 찼다. 기분 나쁘게 왜 쪼개. 그러는 걔도 웃고 있었다. 나근나근한 말투도 다 너무 익숙한 것.
형은 그래도 어떻게든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어.
김영균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태양에 대해서는 전부. 전부......

전부 스스로의 어리석음이었다는 걸.
창 밖이 훤한 게 날이 밝았음을 알게 했다. 모로 누운 허리로 딱딱한 게 걸렸다. 배터리 간당간당하게 남은 핸드폰이 후드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면 아직 준비하고 출근하기까지 여유가 있다. 마른 세수를 해 희미하게 남은 환영을 지워낸다. 빈 방 안은 그저 쩜쩜쩜. 첵랍콕 공항에 내린 이후로 늘 혼자이기는 했지만 신기루가 떠난 방 안이 유독 적막하다고 느낀다. 별 거지같은 꿈을 다 꾼다. 영균이 거울 속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이젠 안 오겠지.)

無明長夜:무명장야

𝐓𝐀𝐍𝐆𝐘𝐔𝐍 𝐂𝐎𝐋𝐋𝐀𝐁𝐎𝐑𝐀𝐓𝐈𝐎𝐍𝐒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