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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의 날은

오지 않아

챠밍

특정 종교에 대한 비하의 목적이 없는 글임을 밝힙니다*

 

 

 

 

 

내일 지구 종말의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나?

 

 

 

 

 

"마지막으로 공연이라도 할까?"

"너 미쳤니?"

 

어느 로맨티시스트의 제안, 은 단번에 묵살당했다.

 

"왜, 멋지잖아."

"곧 다 같이 죽을 판에 멋은 무슨 얼어 죽을 멋이에요. 그냥 가족끼리 보내면 되지."

 

합주실 구석에서 자신의 기타를 챙기던 태양이 나름의 변호를 해봤지만, 그리 큰 힘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영균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묵묵히 튜닝되지 않은 베이스 줄만 몇 번 튕겼다. 투웅- 투웅- 하고, 멜로디도 없는 둔탁한 소리가 작고 냄새나는 합주실을 울렸다. 고요해진 분위기에 영균에게 툴툴거리던 지수도 입술을 꾹 붙였다. 근근이 들리는 한숨 소리, 부피가 큰 패딩이 좁은 합주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느라 스치는 소리, 악기끼리 부딪치는 소리, 뒤에 작게 따라붙는 '미안'. 투웅- 투웅-

 

제 짐을 모두 챙긴 밴드부원들은 쭈뼛거리더니 지수를 필두로 하나둘씩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합주실을 떠났다. 다른 바스락거리는 소음들이 사라지고 남은 건, 퉁-

 

"형은 안 가?"

"넌?"

"나? 나는…. 갈 데 없어."

 

영균은 의자에 앉아 베이스를 마저 튕겼다. 기타 가방까지 메고 멀뚱하니 서 있던 태양이 다시 기타를 풀었다. 영균은 굳이 묻지 않고 태양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봤다. 일렉을 앰프에 연결한 태양이 다른 선을 찾아 영균에게 건넸다. 뭐야? 영균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하자, 공연. 어느 로맨티시스트의 제안. 영균이 슬쩍 웃었다.

 

"베이스랑 일렉 둘이서?"

"노래도 하고."

"드럼도 없고 키보드도 없잖아."

"뭐 어때."

 

아직 선을 쥐고 있던 태양이 보채듯 팔을 부드럽게 두어 번 흔들었다. 뭐 어때. 연결선을, 그걸 잡은 손을 바라보다 덥석 손에 쥐었다. 그래, 뭐. 태양이 기타를 내려두고 냉큼 마이크까지 연결했다. 영균은 간만에 베이스를 튜닝했다. 듣기 싫던 투웅- 소리가 둥둥거리는 음악으로 변했다. 기타를 마저 잡은 태양과 영균의 눈이 마주쳤다. 좁은 지하실에서 어딘가 허접하고 허전한 연주가 흘렀다.

 

 

 

 

 

지구 종말의 날이 확정됐지만, 지구촌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단 평온했다. 방송에 나온 언론인들도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똑똑한 발음으로 속보를 보도할 뿐이었다. 정치인들은 따로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광화문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이지도 않았다. 이유는 하나, 당장 내일이 아니라서.

 

일주일 정도 남은 지구의 종말은 갑작스럽게 찾아올 예정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올 '예정'? 소리 없는 아우성도 아니고, 그런 게 어딨어. 하지만 이보다 더 정확하게 지구의 마지막을 장식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가속화된 지구 온난화, 파괴되는 오존층, 벌의 멸종, 사라지는 삼림 따위의 이유보다 운석 충돌이 한발 빠르게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공룡도 멸종했는데 인간들이 지구보다도 거대한 운석을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특별한 운석에는 이름도 붙여졌다. T.L.O. THE LAST ONE. 센스 구리다. 차라리 T.T.L.이 낫겠다. 아마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운석이 될 테니 저딴 식으로 지었겠지. 안일하긴. 후손들이 저걸 보고 얼마나 비웃겠어. 아, 그럴 일은 없으려나. 영균이 혼란을 막기 위해 댓글 기능이 정지된 인터넷 기사를 훑으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지구 종말의 날을 가족, 연인, 친구, 혹은 기타 등등의 사람들과 보내기 위해 바쁘게 준비했다. 일주일 치 식량을 챙겨두고, 전기가 끊길 것을 대비하는 매뉴얼이 방송되었다. 교통이 마비되고 떠났던 배들이 일제히 항구를 향한다는 소식이 SNS를 타고 퍼졌다. 가게 대부분은 셔터를 내렸고, 이젠 인터넷 기사가 올라오는 속도도 뜸해졌다. 기자들도 가족이 있나 보지. 언론이 멈추자 활발해진 건 SNS였다. 가족도 뭣도 없는 영균이 할 일은 월세방에서 뒹굴며 SNS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이 할 말 못 할 말 다 해가며 싸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다들 크게 분란 일으키지 않고 싶은 건가. 영균은 흥미를 잃고 밀렸던 웹툰을 보기 위해 손가락을 놀렸다. 가장 좋아하던 웹툰은 67화 대신 공지를 올린 채 멈춰있었다. 안녕하세요. 로 시작된 공지는 앞으로의 줄거리와 담고 싶던 내용, 작가의 후기까지 총 100화 정도의 분량을 압축해서 담고 있었다. 영균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원피스 결말'

 

와, 미친. 영균은 제가 죽기 전에 원피스가 뭔지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자주 농담하곤 했었다. 그런데 진짜 죽기 직전에 알려주네. 영균이 입술을 오므렸다. 이제야 종말이 조금 실감 났다. 영균은 그날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잤다. 눈물이 났다. 진짜 조금.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은 있었다.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듣기 싫게 찢어졌다.

 

'이건 신의 뜻입니다! 신께서 우리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종말이 끝나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될 겁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마세요. 이것은 기회이고, 구원이며, 은혜입니다!'

 

좁고 낮은 집에만 있기 싫어 산책을 나오면 대신 고막의 안온함을 내어줘야 했다. 영균은 목도리 속에서 피식피식 웃으며 거리를 걸었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진짜 이러니까 웃긴 거지. 저러면 사람들이 믿겠냐고. 심지어 저 교회는 동네에서 사이비로 유명한 곳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무의식적으로 길 건너편에 있는 교회의 입구를 확인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고 있었다. 허, 믿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교회 앞을 지나쳐야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갈 수 있었다. 영균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민했다. 그냥 돌아갈까. 걷는 김에 좀 더 걸을까. '신의 도움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다시 찢어지는 목소리에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확성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노려봤다. 그리고 귀 끝이 빨개질 때까지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영균은 곧바로 교회 입구로 향했다. 태양이 손에 큰 돌을 들고 그곳에 서 있었다.

 

 

 

영균과 태양이 대단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밴드에서 만나 같이 연습하고 공연도 몇 번 했지만, 뒤풀이 회식에서는 다른 테이블에 앉게 되는 사이. 그래도 연습 중간에 태양이 종종 사라지면 영균이 그 '조금 신경 쓰여서 챙겨야 할 것 같은 형'을 가장 먼저 찾았고, 영균이 술에 취해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는 철학 토크를 시작하면 태양이 옆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고개를 까딱여줄 정도는 되는 사이였다. 상대방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애매한 관심. 그래서 영균은 같이 마지막 공연을 뚱땅거려준 태양이 의외였고 태양은 어디선가 달려와 손에 들려 있던 돌을 빼앗아 가는 영균이 의외였다.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쉰 영균이 돌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형, 지금, 하아, 뭐해 여기서?"

"어…. 안녕."

 

태양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영균에겐 대답을 회피하는 태양을 알아차릴 만큼의 정신머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강조했듯이 영균과 태양이 대단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영균은 태양이 아까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몹시 충격받은 상태였으니까. 무서울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태양은, 굉장히, 음, 화가 나 보였다. 영균은 분노와 유태양을 한 문장에서 연결하는 것이 어색했다. 미안하지만 영균에게 태양은 나이 어린 동생들이 놀려도 제대로 반박도 못 하고 넘어가는 조금 호구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금 신경 쓰이는 형이었던 걸지도. 하지만 아까 본 태양의 눈에서는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것도 고작 며칠 전이었으면서, 영균은 태양이 그런 눈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붉어지다 못해 얼어 터진 태양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래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영균은 위로에 서툴렀다. 거칠한 돌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 건지 손바닥은 여기저기 쓸리고 찍힌 자국으로 가득했다. 영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태양의 손바닥을 한 번, 제가 멀리 던져버린 돌 한 번, 태양이 노려보고 있던 교회 창문 한 번. 얌전하던 이 형이 길을 걷다 고작 시끄러운 방송에 빡이 돌아 창문을 깰 생각을 할 것 같진 않았다. 태양의 차림이 이 겨울에 길을 걷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탓도 있었다.

 

생각에 빠진 영균이 한참 태양의 손을 주물거렸다. 태양은 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손을 쪼물딱대고 있는 광경이 조금 웃겨 보일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필 두 사람이 서 있던 게 교회 앞이라서 조금 더. 하지만 구태여 손을 빼진 않았다. 대충 지구 종말을 맞아 시련을 극복한 세기의 동성애 커플로 위장한 영균이 제 처지도 모르고 태양의 반대 손도 잡아챘다. 얼음장 같은 손을 꼭 쥔 영균이 태양에게 물었다.

 

"어……. 일단 우리 집 갈래? 되게 가까운데. 보일러도 틀어놓고 나왔어."

 

우리 집이 더 가까울걸. 태양은 말을 삼켰다. 대신 영균이 잡아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교회 사람의 발악 같은 연설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작은 자취방은 적막으로 가득 차 태양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만한 공간이 못 되었다. 먹은 그릇을 치우겠다며 영균의 밀린 설거지거리까지 손에 쥔 태양이 그것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쥐고 놓질 않아 영균은 뻘쭘하게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두 사람은 물소리와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가 숨 막히는 어색함을 겨우 떨쳐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게 안 된다면 운석이 조금만 더 빨리 떨어져 준다거나. 호기롭게 데려오고 얼떨결에 따라오긴 했지만 이렇게 단둘이 좁은 공간에 남겨진 적은 웃기지도 않는 공연이 있던 그날을 제외하고는 없었으니까. 둘 사이 대화는 여태 '밥은? 라면 먹을래?' '아, 응.' 이 전부였다. 태양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싱크대로 향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이 너무 고요해 작은 숨소리마저 영균에게 들릴까 봐 태양은 얼른 물을 세게 틀었다. 아직 수도가 끊기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실 영균은 머릿속을 바쁘게 채우는 질문들을 꾹꾹 눌러 담느라 태양이 한숨을 쉬는지 두숨을 쉬는지 알아차릴 관심도 여유도 없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창문 깨려고 한 거야? 아님 그 사람한테 던지려고 했어? 너무 시끄러워서? 아니면 교회를 원래 싫어했는데 기왕 지구도 이렇게 된 거 뭐라도 한탕 저지르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정도를 모르고 그 세력을 확장했다. 머릿속을 점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구멍 끝까지 넘보는 질문을 막아내기 위해 영균은 태양 모르게 부단히도 애썼다. 쌓여있던 설거지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영균의 목이 건조하게 차올랐다.

 

목이 타는 건지, 막히는 건지 알 수 없던 영균이 꺼내 든 것은 맥주 두 캔이었다. 이런 날은 와인인데, 하필 평소에는 잘만 굴러다니던 싸구려 와인이 똑 떨어진 참이었다. 이제 파는 곳도 없을 텐데. 닫힌 집 앞 편의점 유리라도 깨부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균은 그냥 맥주와 먹을만한 안줏거리를 찾기로 했다. 영균은 남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침 먹을만한 과자 몇 봉지가 있었다. 혼자 먹기에는 많고 둘이 먹기에는 적당한 양이었다.

물소리가 뚝 끊기자 타이밍 좋게 비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고무장갑까지 괜히 몇 번 털어 정리해본 태양이 뒤돌자 아까 닦아둔 앉은뱅이 식탁 위에 과자 몇 봉지와 맥주 두 캔이 놓여 있었다.

 

"맥주 괜찮지?"

"좋지."

 

태양은 군말 없이 영균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둘이 같은 식탁에 앉아 나란히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태양도 영균도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가 어색하게 얼어붙었다. 태양도 영균도,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새우 과자 씹는 소리만 각자의 귀에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바람에 혓바닥으로 녹여 먹기를 몇 분,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태양이었다.

 

"너 나한테 뭐 물어볼 거 없어?"

"없어."

 

너무 곧장 튀어나온 대답에 머쓱해진 태양이 과자로 뻗던 손을 물려 맥주캔을 쥐었다. 아, 그렇구나. 급하게 들이킨 탓에 캔이 가벼웠다. 영균도 태양을 따라 맥주를 벌컥벌컥 비웠다. 없기는 개뿔이, 뭐 물어보고 싶었던 게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 냅다 부인부터 해버린 것이었다. 질문 타이밍을 완벽하게 흘려보낸 영균이 아직도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는 조금 전의 광경을 애써 지워냈다. 그럴 수도 있지. 태양이 다시 돌을 던질 것 같지도 않았다. 저 형도 사정이 있었겠지. 급하게 마신 술기운이 힘을 드디어 힘을 발휘하는 것인지, 알딸딸하게 데워진 볼이 바닥으로 축축 처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관대해진 영균이 새 맥주를 두 캔 더 꺼내오며 다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형은,"

 

사후세계 같은 거 믿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태양이 푸핫, 하며 크게 웃었다. 영문 모르는 영균은 태양이 자신을 비웃는 건 아닌지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태양은 그걸 알고서도 한참을 큭큭 거렸다. 같은 테이블에서 이런 이야기 듣기는 또 처음인데. 태양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얼굴이 조금 발개졌다. 웃음을 멈춘 태양이 가만히 앉아 고개를 까딱였다. 영균이 그 버릇 같은 행동을 무어라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텐션이 한 단계 오른 것은 확실했다. 영균은 여느 때처럼 끝도 없는 이야기를 쏟아냈고 태양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간간이 맞장구를 쳐주거나 영균이 쉴 때는 짧게 제 이야기를 했다. 난 사후세계 안 믿어.

 

 

 

6개들이 맥주를 전부 비워내자 남은 건 푸- 푸우- 하는 숨소리였다. 태양의 손에서 구겨진 마지막 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다. 끊이지 않던 대화가 갑작스러운 끝을 맞았다. 푸- 푸- 영균이 부실한 침대 프레임에 몸을 기댔다. 태양의 상체는 식탁 위로 엎어지기 직전이었다. 꾸벅 꾸벅. 콩. 하고, 태양의 반듯한 이마가 플라스틱 테이블과 조용히 부딪혔다. 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태양은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작게 떨기 시작했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던 영균의 어깨도 조금씩 들썩거렸다. 새벽에 난데없이 떨어진 웃음 폭탄은 적어도 이 방에서만큼은 운석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둘은 이유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멈추면 어쩐지 분위기가 묘해질 것만 같아서, 태양이 웃음을 멈추면 영균이 웃는 소리를 흉내 냈고 영균이 기운 빠진 듯 푸-푸- 거리면 태양이 다시 웃었다. 취기 조금 오른 시선의 끝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눈치 보이는 웃음 랠리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둘은 모른다. 다만 아까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깨닫는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화를 다시 시작했고 서로가 꽤 괜찮은 대화 파트너라는 것을 인정했다. 영균이 말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형이랑 좀 더 일찍 이야기할 걸 그랬다."

"나는 니 이야기 들었는데."

"언제?"

"회식 때. 옆에서 니 얘기 다 듣고 있었어 나는."

 

아, 진짜.

영균의 대답이 조금 떨렸던 것도 같았다. 태양이 영균을 빤히 쳐다보다 상체를 천천히 기울였다. 이번 목적지는 테이블 위가 아니었다. 태양도 영균도 서로가 취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영균은 눈을 감았다. 두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누구도 종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 채 남지 않은 시간이 못내 아쉬워서. 이제 한 손에 달린 손가락만으로도 카운팅할 수 있는 지구의 끝과 그 후에 사라질 감정이 아까워서. 두 사람은 갈수록 조용해지기만 하는 새벽의 거리를 걸었다. 태양과 마주쳤던 교회 건물 근처는 의식적으로 피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웬만한 곳은 전부 가봤다.

 

"바다가 근처에 있었으면 좋았을걸."

"형 바다 좋아해? 차라도 한 대 훔쳐줘?"

 

나 면허도 있잖아. 영균의 장난스러운 허세에 태양이 픽 웃었다. 나도 있거든.

 

"그냥. 둘이서 바다도 못 가봤잖아."

"…지금부터 걸으면 이틀 안에는 도착하지 않을까?"

"됐어, 추워. 집에 가자."

 

둘에게, 모두에게 남은 시간이 채 48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머릿속으로 바다를 그리던 영균의 어깨에 태양이 몸을 구겨 기댔다. 그러더니 대뜸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런 분야에서는 영균이 스페셜리스트였는데, 같이 조금 지냈다고 태양도 제법 괜찮은 실력을 자랑했다. 그 내용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때 그 교회 목사가 우리 아빠야. 확성기 잡은 사람은 우리 엄마."

 

영균은 태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지만, 아직 태양처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못 되었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바짝 굳은 영균의 어깨 위에서 태양이 조금 웃었다. 입만 뻐끔거리는 영균을 위해 태양은 대신 입을 열었다.

 

너도 알지? 거기 소문. 그거 다 맞아. 말이 교회지 그냥 사이비야. 그래도 가족이니까…. 지구 종말 뉴스 보고 바로 달려갔거든. 그런데 집에 없는 거야. 교회에 있더라고. 가족끼리 보내자고 말도 못 꺼냈어. 이게 다 신의 뜻이고 구원이고 은혜니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무슨, 더 나은 세상에 가는 거라고. 다 죽는데 그게 무슨 구원이야. 그치.

 

지금껏 태양이 했던 말 중 가장 긴 이야기이자 지금까지 영균이 들은 말 중 가장 복잡한 이야기의 끝에는 각자의 적막이 찾아왔다. 태양은 더 이상 말할 에너지가 없었고 영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후에 취해야 할 적절한 반응을 생각해내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기가 끊긴 지도 한참 된 집은 한동안 싸구려 양초가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만 근근이 울렸다.

양초가 슬슬 바닥을 보였다. 양초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태양이 새것을 꺼내려 영균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나는 부모님 안 계셔."

"어?"

"가족도 없고… 아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내가 더 불쌍하다는 뜻이 아니고….

영균은 말을 많이 했지만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양은 잘 듣는 편이었다. 태양이 움직이자 마음이 급해져 불쑥 꺼낸 말을 주워 담느라 바쁜 영균에게 태양은 기꺼이 웃어주었다. 저 정도면 됐다, 고 생각했다. 저 정도 반응이면 됐다고. 남은 이틀은 더 이상 콱 막힌 것 같은 가슴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겠다고. 태양이 큰 손으로 영균의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어쨌든 새 양초는 가져와야 하니까. 하지만 태양의 그 행동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영균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덥석 잡아챘다. 영균은 진심으로 태양을 잡아주고 싶었다. 교회 앞에서 돌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마지막 공연을 해보자며 악기 연결선을 건네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양초의 불씨가 작아지고 있었다. 태양은 영균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형."

"왜."

"유태양."

"너는 형한테 유태양이 뭐니."

"그럼 우리 신의 뜻 한번 어겨볼래."

 

어느 로맨티시스트의 제안.

 

 

 

 

 

다음날 두 사람은 평소보다 이르게 눈을 뜨고, 평소보다 괜찮은 식사를 하고, 평소보다 멀끔한 옷을 걸쳤다. 10분 정도 쭉 걸으면 옥상이 열린 꽤 높은 건물 하나가 있었다. 그날 둘에겐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주어졌다. 좋은 소식은 더 볼 것도 없는 도시 한복판의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고, 나쁜 소식은 건물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점이었다. 둘은 기진맥진해서 옥상의 녹색 바닥에 드러누웠다. 꼭 맞잡은 손은 식은땀이 배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손을 빼 옷에 문지르거나 하는 무드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 힘들어……. 진짜 차 빌려서 바다나 갈 걸 그랬나."

"야 됐어. 더 걸으면 쓰러져."

"그래도 형 가고 싶어 했잖아."

"내가 언제?"

"어제 그랬거든?"

"그거 너 때문인데."

"나?"

"응, 니가 처음에 그랬어. 애인이랑 바다 가보고 싶었다고."

 

아가리낭만주의자는 이런 뜬금로맨티시스트에게 약했다. 한쪽이 입을 다물자 다른 한쪽도 같이 조용해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마저 잦아들자 도시 전체에 적막이 흐를 것만 같았다. 둘은 지금이 적합한 타이밍이라는 걸 동시에 깨달았다. 두 사람이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 패딩을 입었다가 터져서 털이라도 날리면 꼴이 우습다고 빼입은 코트가 엉망이었다. 서로 묻은 먼지를 털어줄 법도 한데,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아 둘은 결국 그대로 난간에 기대섰다.

 

겨울바람이 추웠다.

 

옥상 난간이 부실하게 흔들렸다.

 

 

 

 

 

지구 종말의 날은 오지 않아

fin.

 

 

 

‘교만‘

: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부인하는 최고의 범죄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無明長夜:무명장야

𝐓𝐀𝐍𝐆𝐘𝐔𝐍 𝐂𝐎𝐋𝐋𝐀𝐁𝐎𝐑𝐀𝐓𝐈𝐎𝐍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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