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기 위해 묶는
크리스마스 선물상자처럼
최덕팔
살아가면서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고찰들이 있다. 내게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랑’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 중 특히 한국 드라마를 좋아했다. 막장이면 더 좋고 니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제 상관 안 해 가보자 갈 데까지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에 키스씬 겸해져 있으면 더 더 좋고. 그런 매체 미디어를 접하던 사춘기 시절의 나는 드라마 속 온전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의 뜨거운 사랑(혹은…. 키스)를 꿈꿨었다. 그런데 유태양과의 사랑은 그렇지 않았다. 팔팔 끓는 뜨거운 물에 냉수 한 그릇 확 부어버린 것처럼 뜨뜻미지근한 연애가 지속되었다. 내가 줄곧 보던 브라운관 속 사랑은 모두 기승전결이 있었는데 우리의 연애는 기전전전...이었다. 어쩌면 기승승승...일지도, 아니 어쩌면 기기기기..일지도 모를 그런 연애를 유태양과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결이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는 연애였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앳저녁에 결이 찍혔어도 아무도 모를 연애였다.
연인과 뜨겁게 사랑하다 나태하게 늙어가는 것이 과거 언젠가의 꿈이었으나 막상 나태로운 일상이 반복되니 죽을 맛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해 보았고, 확실히 지금 우리 관계에는 결.이 필요했다. (진짜 결.은 아니고 ‘기승전 그리고 결...인줄 알았으나 사실은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같은 거다. 즉, 새로 시작하기 위한 이별인 것이다. 풀기 위해 묶는 크리스마스 선물상자처럼.)
나는 결별을 야기할 고백을 준비했고, 질렀다.
-형. 우리 좀 헤어져 보는 게 어때?
말끝이 조금 떨렸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을 땐 적당히 내가 아예 유태양에게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면서도 또 적당히 쿨하고 적당히 헤어지자는 의사가 전달될 만한 말 같았는데, 내뱉고 보니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유태양은 반응이 없었다. 당황하면 안 된다. 유태양은 수능기출변형문제 1800제(2006~2020 누적 판매 1위)같은 사람이라 언제 어디서 나를 방심시킬지 모른다. 그렇게 몇 초 가만히 있다 유태양 입이 열렸다. “농담이지?” 웃기시네~나를 이렇게 방치해놓고 뻔뻔하게 농담이지??? 역시 유태양에겐 위기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침묵으로 의사를 표하니 유태양 눈이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내가 좋아했던, 좋아한다고 입 밖으론 꺼낸 적 없는, 지금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는 유태양의 두툼한 애교살이 조금 떨렸다. 저게 원래도 저렇게 핑크빛 돌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유태양이 나를 한 번은 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마음 한 구석에 피어났다. (내가 기대한 게 아니고 걔가 기대하게 만든 거 오해ㄴ)당연히 그 형은 내 무참히 깨버리고, 내 예상을 정확히 적중시켰다. 유태양은 그렇게 22개월 26일 동안 지 집처럼 지내던 내 자취방에서 자기 패딩에 지갑, 휴대폰 달랑 세 개 챙겨서 나갔다. 나가면서 한마디 했다.
마음 바뀌면 다시 연락해. 연락해! 도 아니고 연락해~도 아니고 연락해ㅋ 도 아닌 연락해. 글로 썼으면 분명 온점까지 다 찍혔을 연락해.
유태양 끝까지 지대로 담백하다. 뭔가 받아쳐야 할 것 같아서 한마디 했다. 짐은 그게 전부야? shit, 또다시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유태양도 또 다시 담백하게 없어. 그러곤 문 닫고 나갔다. 그게 너무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사람 같아서 조금 울적해졌다. 철퍽 철퍽 슬리퍼 소리가 멀어져가는 게 자꾸 귀에 들어왔다. 유태양은 맨날 다 떨어져 나가는 짭디다스 삼선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하나 사주겠다고 해도 신발이 뭐가 중요하냐며 됐다고 고기나 사 달랬는데.. 그래도 그게 궁상같지 않고 좋았다. 그땐 그랬다.
저 소린 언제까지 나지? 복도가 긴 편도 아닌데. 생각하면서 가만히 그 철퍽철퍽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막상 헤어지니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아니 원래 현실감각이 떨어져서 헤어지자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도 몰랐다. 괜스레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진짜 헤어졌다고? 유태양이랑? 기분이 멍해져 창밖을 보니 하늘이 유태양이 좋아하던 구름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구름이 하나도 없고 차들도 하나도 안보이고 한겨울인데 귓가엔 맴맴 매미 우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아래층엔 기관지 약한 아저씨가 사는데 매캐한 담배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붕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생각도 해봤는데 볼을 꼬집으니 따끔했다. 사실 그거보다 더 아팠다. 피부가 약해서 금세 빨갛게 자국이 올라왔다. 가라앉히려고 찬물 세수하면서 씨발. 한마디 했다. 헤어지고 나니까 욕지거리가 내뱉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하고.. 술이 좀 마시고 싶기도 해서 그 길로 단톡방에 카톡 하나 갈겼다. 이 새끼들아 나와라 술빨자. 인성이 형이 드디어 미친거냐고 물어봤다. 그냥 조금 막나가고 싶어서 그랬다.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유태양과 헤어졌는데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닌가?ㅋ 아님말고. 물기를 안 닦고 그냥 나와서 마루에 뚝뚝 찬물이 떨어졌다.
나는 별별 개같은 로망이 많았다. 헤어지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꼬장부리는 것도 어쩌면 내 로망이었다. 젠장, 조금 설레고 또 조금 좇같았다. 술자리 갈 준비를 하며 생목으로 이별노래 하나 갈겼다. 으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공감이 하나도 안 갔다. 나는 갈 곳이 어딘지도 알고 지금 울지도 않는다. 나는 그게 무서워졌다. 폭풍전야 마냥 잔잔한 내 마음이 소주 한 잔 들어갔을 때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웠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우리 집이 가장 가까운 편이라 늑장 부리다 약속 시각에 살짝 늦었다. 그거 조금 늦었다고 인성이 형이랑 재윤이 형은 이미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입맛 짭짭 다시고 있는 영빈이 형도 보였다. 역시 강찬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형들은 늙어서 노후 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인지 맨날 주식 얘기만 한다. 이번에 삼성전자가 어쩌고, 셀트리온이 어쩌고, 아니다 이번 년에는 전기차가 중요하다 테슬라를 사야한다 어쩌고. 어휴 저 형들 저러다 가지고 있는 주식들 손해나면 술집도 아니고 편의점 의자에서 깡소주깐다. 예전에 형들 저러는 것도 어른같고 멋있어서 유태양한테 나도 주식해볼까?한적이 있는데 유태양은 나중에 자기가 돈 많이 벌어올테니 주식은 하지 말라고 나는 기분파라 그런거 하면 큰일난다 그랬다. 그 때는 그냥 춤말고는 해본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유태양 얼굴이 잘생겨서 그 허무맹랑한 소리 믿고 노후 준비 안하고 있었는데, 우리 진짜 헤어지면 유태양 없는 내 노후는 어떡하지. 어쩐지 숙연해졌다.
형들도 그 시끄러움에 한몫하고 있는, 왁자지껄 정신없는 가게에 소주 냄새 고기 냄새 풀풀 나는 취객들 사이를 지나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형들은 어그래영균이왔니하고 한 번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자기들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나 헤어졌어.” 야들야들 방금 딱 알맞게 익은 대패삼겹 한 점을 입 안에 넣으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하던 세 개의 입들이 제각각 작용을 멈췄다. “어.. 그럴.. 수 있지 야 영균아 세상에 남자 많다. 어? 뭐 형이 잘생긴 애 하나 소개해줘?” 인성이 형이 아는 게이라곤 나랑 유태양 딱 둘뿐인 거 내가 뻔히 아는데 저런 어리숙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재윤이 형도 “와~ 나는 니네 진짜 캐나다로 이민가가지고 결혼까지 할 줄 알았는데 이외네.. 영균아 니 우짜다 차였노?” 하고 말도 안 되는 위로..도 아닌 뭔 개소리를 건넨다. 무슨 소리냐고 내가 찬 거라고 고래고래 신경질을 부렸다. 하여튼 저 형은 보는 눈이 없어. 재윤이 형은 유태양이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유태양을 더 좋아해서 내가 차인 줄 알았단다 빡쳐서 바로 유태양이 얼마나 날 사랑했는가에 대한 연설 들어갔다.
1997년 2월 28일 출생 유 씨 집안 차남 유 태양 군께서는 지난 2020년도 송파제 부스 중 요구르트 20개 5분 안에 마시기 부스에서 성공 상품인 에어팟을 가지고 싶다는 나 김영균의 말 한마디에 바로 출전비 10,000원을 고민 하나 없이 지출하시고 당당히 내 품에 에어팟을 안겨주셨으며... “이야~ 태양이 대단하네~ 난 그 부스 생각만 해도 토쏠려; 나는 그거 안했는데도 그 주변이 무슨 토밭이여서 냄새만 맡고도 헛구역질 엄청 했어 ;” 영빈이 형이 말했다. 근데 이 형은 12학번이면서 왜 20년도 축제를 즐겼던 거지.. 졸업안하나? 생각하며 소주 한 잔 홀짝했다. “그, 유태양이 평소에 자기 변비 같다고 매일 요구르트 10개씩 먹었거든요. 똥을 3일에 한 번밖에 못 싼다고..ㅋㅋ 사실 남들보다 1/3밖에 안 먹어서 그런거 같은데ㅋ” 어후 생각하니까 열불이 났다. 그거 다 내가 분리수거했는데. 개새끼.. 요구르트 뚜껑 뗀다고 손톱을 못 잘랐다. 또 소주 한 잔 홀짝 하고 하던 얘기마저 했다. “그리구 또 유태양이 얼마나 절 사랑했냐면... 저 작년에 진짜 세게 독감 걸린 적 있는 거 알죠. 그 때 빌빌거리면서 아파서 죽을 거 같다고 유태양한테 전화했는데 형이 그 날 강의 째고 바로 죽 사서 우리집 달려왔어요. 걔 평소에 잔다고 수업 많이 째서 하나만 더 째면 재수강해야 했는데 나 아프다고..ㅠ” 말하다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왜 지금 헤어진 전남친 자랑을 하고 있지 싶었다. 그리고 말하면서 계속 조금씩 마신 술의 양이 좀 됐는지 취기가 올라왔다. 자꾸 유태양이 보고싶었다. 씨발 기승전결 좀 없으면 어때. 몸이 그렇게 예술인데.. 진짜 미쳤나 보다. 내가 차 놓고 내가 보고싶다 이러고 있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이번엔 소주를 홀짝 말고 병째로 콸콸 들이켰다. 어지러웠다.
유태양과 나는 둘 다 영화를 보며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해서 함께 본 영화가 많았다. 유태양은 해리포터, 그중에서도 마법사의 돌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그 영화를 많이 봤다. 나는 흐려져 가는 정신 속에서 폰을 꼬옥 쥐고 유태양이 좋아한 그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완전 똑같이는 아니고 조금 바꿔서. 다 꼬인 혀로 유태양은 안 돼... 유태양은 안 돼... 그랬다. 안 그러면 금방이라고 유태양한테 전화 걸 것만 같아서. 그러고 나서의 기억은 없다.
아침에 일어나니 누가 데려다준 것인지 내 자취방 침대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상하게 숙취도 없고 속이 개운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정말 맑았다. 천사가 내려와도 그럴듯한 하늘. 귓가에 성가대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기분이 요상했다. 이런 하늘을 본 날이면 99% 늦잠을 잤거나 나머지 1% 유태양과 헤어졌었다. 불안해서 휴대폰을 켜보니 시간은 09:16 am. 그렇게 꽐라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간에 기상했으며 심지어 오늘은 명확한 일요일이다. 그렇다면 이 불안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불현듯 휴대폰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설마 유태양한테 연락했나? 그렇지만 뭔가 그건 아닐 것이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폰을 켜니 일단 새로온 알림도, 특별히 새로 생긴 전화내역도 없었다. 이상했다. 마지막 의심을 놓지 못하며 카카오톡에 들어갔다.
**, ***.
차라리 유태양에게 카톡을 해도 이것보단 배로 나았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한강물에 뛰어들고싶었다. 휴대폰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봤었을 때는 없었던 카톡방이 하나 생겨있었다. ...유태양도 아니고 유태양 알바하는 키즈카페 사장님도 아니고 유태양네 나나도 아니고 무려 유태양 어머님과의 카톡방...;; 젠장할. 미리보기에 ‘저 영균이에요 여러 번 고민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태양이 형...’까지 보였다. 무슨 ‘방군줄 알고 힘줬는데 똥이었어 (엔터)(엔터)(엔터)(엔터)(엔터)(엔터)(엔터) 너 진짜 내 연락 봐라’ 마냥 누가 봐도 클릭해보고 싶을법한 미리보기였다. 어머니께서 이 알림을 못보셨길 유태양 아침잠 많은게 어머니쪽 유전이길 간절히 빌었다. 확인해보니 다행히 아직 주무시는지 숫자 1이 남아있었으나 카톡 내용은 다행스럽지 않은 내용이었다. ...‘저 영균이에요 여러 번 고민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태양이 형 애교살이 예쁜 거 같아요.
태양이 형은 눈도 정말 예쁘고 코도 예뻐요. 저 아직 태양이 형을 너무 사랑하나봐요. 태양이 형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취해서 이런 카톡 보냈는지 맨정신으로 보냈는지 분간도 안가게 맞춤법도 완벽했다. 그런데 헤어진 와중에 그것도 내가 차서 헤어진 와중에 이렇게 절절한 고백을 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유태양 어머님께서 아유태양을 이성애자로 알고계시고 유교적인 면이 다분하며 우리 2년 가량 연애하는 동안 어머님께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강까지 갈 것도 없어 당장 집에서 가스불 켜고 자살해야했다. 유태양 분명 이거 들키면 카드 뺏기고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러면 유태양 친구도 없어서 우리집 찾아올텐데 그러면 들여보내줘야하나 말아야하나 들여보내준다면 우린 다시 시작하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까지 생각의 흐름이 흘러왔을 때, 09:30 am. 휴대폰 액정 속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일요일 09:30 am. 무언가 생각나는 일시가 아닌가. 유태양은 아침잠 때문에 강의도 꽤나 빼먹었으면서 일요일 아침 9시 반에 하는 동물농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챙겨봤다. 그리고 아마도 2년 사귄 애인과 헤어진 다음 날까지도 동물농장을 볼 것이 틀림없다. 이 말은 종합해 보면 아직 유태양 어머니께서는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지 않으셨고, 이 시간에 유태양은 깨어있으며 두 사람은 한 집에 산다는 것이다. 바로 유태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태양이 그 카톡을 보고난 후의 미래보다 어머님께서 그 카톡을 보고난 후의 미래가 더 두려웠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삑. 신호음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유태양이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내가 다시 연락할줄 알았다고 했다.
아니 급해죽겠는데 왜 이렇게 나 꼬시고 난리야(♡) 그래도 바쁘니 대충 되받아치고 현재 형 위치, 어머님 위치, 어머님 휴대폰 비밀번호 여부, 수면 여부까지 알아냈다. 유태양은 왜?라는 질문하나 안하고 얌전히 그걸 다 불었다. 모두 완벽히 톱니바퀴가 맞아들었다. 어머님 폰에서 내 실수를 지우기에 더 없이 완전한 상태였다. 유태양에게 어제 너 때문에 술먹다 꽐라돼서 어머님께 널 사랑한다는 구구절절 고백을 남겼고 그걸 어머님이 깨시기 전에 지워달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은 민망해서 중간중간 머리를 벅벅 긁긴 했지만 잘 해냈다. 유태양이 역시 너 아직 날 사랑하는구나같은 뻘소리를 내뱉을 줄 알았는데 또 그저 담백하게 '알겠어.'그러곤 전화를 끊었다.
큰 사건 하나 넘기니 순식간에 허기가 찾아왔다. 해장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해서 배민으로 데리버거 세트 하나 간단하게 시켰다. 아니 사실 세트만 시키려고했는데 습관적으로 양념감자까지 어니언 맛으로 하나 더 시켰다. 나는 원래 양파 냄새를 썩 좋아하지 았았는데 유태양한테 취향이 옮았다. 어니언 시즈닝이 부려진 감튀 먹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키스하려 드는 유태양 때문에 이젠 그 시즈닝 없으면 입이 텁텁한 지경이다.
유태양이 내 취중진담을 봤으니 이제 내곁으로 돌아와 또 그렇게 양파맛 나는 키스나 하면서 일상을 보내게되는 걸까. 또 양파맛 키스를 나누고 또 '니가 키스하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봤자나 영규나'하면 또 나는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상황이 반복될까. 그리고 정말로 일상이 반복되면 그것이 나태일까. 과거의 나느 그렇기 생각했나? 아니 그냥 '나 태양이 형 사랑함'을 줄여서 나태라고 하는게 내 일상과는 더 적합했던 것같다. 특별하게 제작된 브라운관 속 사랑보다도 우리의 사랑이 더 특출나서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나는 바보였다. 그것을 하루만아 깨닫게 된 것은 다행이었고 하루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불행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한다면 나 바보같은게 티가 더 나니까 그런 짓 하기 전에 유태양이 아무 것도 모른 척, 나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척 먼저 전화 걸어주길 빌었다.
그렇게 가만히 유태양 생각을 하던 중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올 건 70분 전 주문한 햄버거 뿐이었다. 관리실에서는 관리비는 꼬박꼬박 다 받으면서 고장난 초인종은 몇 개월째 고쳐주지 않았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문의를 넣어야겠다 생각하면서 햄버거를 받으러 갔다. 나가는 새에 문을 한 번 더 두드리셨다. 배달원 분께서 성질이 급하신가... 그런데 배달은 왜 이리 오래 걸렸대? 아침부터 쫄쫄 굶은터라 급한 건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덜그럭하거 문을 여니 성질 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배달원 분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태양이었다. 연락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래도 얼굴보고 얘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작 하루 못 봤는데 한 달은 못봤던 사람마냥 왠지 반가웠다. 그래도 가오가 있지 티는 안냈다. 내가 왜 왔냐고 묻기 전에 유태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좀 재워주라."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뜬금없었지만 실수한 게 있으니 일단 집 안으로 들였다. 처음 봤을 땐 유태양이라는 존재 자체에 당황해서 다른 것은 잘 못 봤는데 겉보기에 상태가 썩 좋진 않았다. 평소에도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은 뭐랄까 무슨 일요일 아침에 동물농장보려고 일어났다가 하루 전날이 헤어진 엑스보이프랜드에게 호모포빅하는 엄마한테 동성연애고백 비슷한 카톡을 보냈다는 연락을 받고 카톡 내용을 확인했지만 그냥 어머니 보시게 내비둔 사람이 외투 한장, 다 떨어진 스레빠 차림으로 쫓겨난 몰골같았다. ㅋㅋ...설마... 등골이 서늘했다. 유태양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태양은 태연히 영규나 문 앞에 햄버거 와 있던데 그거 내가 먹어두 되닝 우웅 난 불고기버거가 좋은데... 그랬다. 배달원 분께서 초인종만 한 번 누르시고 그냥 가신건지 다 식어빠진 햄버거랑 양념감자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묻고 싶은게 많았는데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려와서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나도 아침부터 쫄쫄 굶었는데 지금은 그냥 안 먹어도 배가 더부룩했다.
그걸 혼자 다 먹고서도 입맛 쩝쩝 다시고 있는 유태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별거아니라는 말투로 그냥 어머니께 내가 보낸 카톡을 보여드렸다고 했다. 아, 진짜 사랑에 미친 또라이인가. 유태양은 옛날부터 고생을 사서하는 타입이었다. 이번에는 왜 그랬냐고 물으니 샹 내가 술 꼴어서 그딴 소리 지깔이는 것을 어머니께 자랑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저렇게 저속하게 말하진 않았고 그냥 '영규나 니가 날 사랑한다고 우리 엄마한테 고백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 메세지를 지울 수가 있겠니.'했다. 조금 어이가 없었고 또 조금 유태양이 사랑스러웠다. 얼빠진 표정으로 유태양을 빤히 쳐다보니 유태양도 나를 마주 쳐다봤다. 무언가 기시감이 든다 싶기 무섭게 유태양이 입술을 부벼왔다. 익숙한 양파맛이 훅 풍겼다. 갑자기라 순간적으로 당황해 유태양 손목을 붙잡으니, 심장박동소리가 아까 유태양이 문 두드리던 소리마냥 쿵쿵. 쿵쿵. 거렸다. 나에게 딱 맞는 자리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처음 일상의 반복에서 비롯한 나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나는 집에서 쫓겨난 유태양을 맡아 키우는 동거의 형태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언젠가 또 일상이 반복되는 일이 있더래도, 나는 더 이상 그 일상을 나태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괜찮은 첫시작이었다.